1. 작은 손, 고요한 숨결 앞에서 마주한 질문
며칠 전, 딸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생명은 말없이, 그러나 강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을 맞추는 그 순간, 나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감격이었고, 경이로움이었고, 그 무엇보다 ‘순수’ 그 자체였습니다.
그 아기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인간은 본래 착한 존재일까?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이고 욕망으로 가득 찬 존재일까?
이 오래된 질문이 낯설게 내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인간은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아이들은 웃고, 사랑하며, 서로 돕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악의와 이기심 앞에서 나의 그 신념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란 말인가?
그것도 어딘가 모르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생명을 보고 있노라니, 선과 악이라는 두 극단의 이론이 모두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2. 맹자의 성선설: 인간은 착하게 태어난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착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에는 네 가지 씨앗이 있습니다.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입니다.
이 네 가지 마음은 선함의 씨앗이며, 그것이 자라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라는 도덕의 꽃으로 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맹자는 인간이 악을 저지를 때조차도, 그것은 본성을 잃었기 때문이지 본성이 악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환경이나 교육, 사회적 조건이 본래의 착한 본성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이론은 어쩌면 우리가 아이를 볼 때 느끼는 감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아무런 악의도 없고, 무지하며 순결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생존 본능일 뿐 타인을 해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작은 생명이 어머니의 품을 찾고, 배고픔을 표현하고, 눈물로 의사를 전하는 것조차도 이기심이 아니라 ‘신뢰’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맹자는 아마도 그런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보고 성선설을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의 관점에서는 모든 악은 학습된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을 품고,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존재이며, 그 가능성은 어떤 씨앗보다 강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과연 그렇게 단순할까요?
3. 순자의 성악설: 인간은 이기적 욕망의 존재
맹자보다 조금 후대의 사상가인 순자는 맹자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은 본래 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욕망과 감정을 품고 있으며, 그대로 방치하면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육과 법, 제도, 규범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순자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선한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순자의 이론을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부터 규칙을 배우지 않으면 아이들은 타인의 장난감을 빼앗거나, 울고 떼를 쓰기도 합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많은 제약과 규율 속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평화로운 공동체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전쟁과 폭력, 억압과 착취가 인간의 손에 의해 벌어졌습니다.
무고한 이들이 학살당하고, 권력을 쥔 자들이 약자를 짓밟는 현실 앞에서, 인간이 선하다는 믿음은 가끔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의 실상을 보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악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어쩌면 인간은 본래 욕망을 가진 존재이고, 그 욕망을 다스리지 않으면 끝없이 타락하는 운명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4. 본성은 선과 악, 그 사이 어딘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눈앞의 갓난아기를 보며 성선설을 믿고 싶어지는 마음,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이기심을 경험하며 성악설에 끌리는 이성 사이에서 나는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겼습니다.
결국, 인간은 선과 악 어느 한쪽으로만 단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선의 가능성과 악의 가능성을 모두 품고 태어납니다.
본성이 선하다고 해서 선한 행동만 하는 것도 아니고, 본성이 악하다고 해서 악한 행동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인간은 선해지고 싶은 욕망과 악해질 수 있는 본능 사이를 오가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마다 ‘나의 본성’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모여 하나의 인생, 하나의 사회, 하나의 인류사를 만들어갑니다.
아기가 성장하며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어떤 사랑을 받고 어떤 가치를 배우는지가 그녀의 마음속 선과 악의 저울을 기울이게 할 것입니다.
부모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 아이가 선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마치며: 다시, 천사 같은 아기를 보며...
아기의 샛별같은 눈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다짐했습니다.
이 아이에게 세상은 아직 새하얀 캔버스입니다.
그 위에 어떤 색을 칠할지는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습니다.
맹자의 말처럼, 그녀 안에는 연민의 씨앗이 있을 것이고,
순자의 말처럼, 욕망 또한 꿈틀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운명’은 아닙니다.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세상이 따뜻하고, 정의롭고, 사랑으로 가득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선함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자라나기를...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이 오래된 논쟁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아름다운 결론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