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피하고 싶은 마음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존재입니다.어릴 적 부모의 눈빛 하나, 미소 한 줄에도 마음이 달아오르던 기억은 우리 내면에 ‘사랑받고 싶은 존재’로서의 자아를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 조건 없이 존재를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사람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심리적 토양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사랑을 두려워합니다. 누군가와 친밀해질수록, 내 안의 불안한 조각들도 함께 드러납니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상처까지 보이는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가까이 다가오는 사랑 앞에서 갑자기 마음이 어색해지고, 되레 한 걸음 물러서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합니다.
이 아이러니한 마음의 이중성은 결코 특별한 사람이 겪는 혼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깊이 새겨진, 관계의 흔들림 속에서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심리의 얼굴입니다.
2. 사랑받기 위해 만든 ‘가짜 나’: 적응의 가면
어린 시절, 우리는 생존을 위해 사랑을 받아야 했습니다.
“착해야 사랑받는다”, “말 잘 들어야 칭찬받는다”, “성공해야 인정받는다”
우리는 점점 자기 본연의 감정보다 사랑받기 위한 행동을 우선하게 됩니다. 이런 반복은 마음속에 ‘진짜 나’와 ‘사랑받기 위한 나’를 구분 짓게 만듭니다.
‘진짜 나’는 슬프고 화도 나며,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때때로 고집도 부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들이 사랑을 위협한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억누릅니다. 그 대신 웃는 얼굴, 착한 행동, 주변을 먼저 챙기는 태도 등 사랑을 보장받기 위한 적응의 가면을 만들어갑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가면이 나인 줄 알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심보다 타인의 반응을 먼저 살피고, 마음이 불편한데도 “괜찮아요”라고 말하게 됩니다.
사랑받기 위해,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 스스로를 감추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짜 나를 억누른 사랑은, 온전히 받아들여졌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널 사랑해”라고 말해도, 그 사랑이 내가 아닌 ‘가면’을 향한 것 같아 마음은 공허합니다.
“정말 나를 알고도 사랑할까?”
이 의심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면, 우리는 또다시 사랑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섭니다.
3. 친밀함은 왜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가?
어떤 사람은 연애가 시작되면 처음엔 활짝 웃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차가워지고, 이유 없이 거리를 둡니다. 다정함이 깊어질수록, 관계가 익숙해질수록 마음이 조용히 얼어붙는 느낌...
이 현상은 단순한 기분 변화가 아니라, 심리학에서는 ‘친밀감 공포’(Fear of Intimacy)라고 불리는 반응입니다.
사랑은 감정을 열게 만듭니다. 상대에게 마음을 열고, 내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보여주는 일은 매우 용기 있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나를 드러낸다는 건, 곧 거절당할 수 있는 위험도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어릴 적 상처받았던 경험, 사랑이 단절되었던 기억, 혼자였던 순간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속삭입니다.
“네가 진짜 모습을 보이면 떠날 거야”
“너무 기대하지 마. 상처받을지도 몰라”
그래서 어떤 사람은 관계가 깊어질수록 괜히 시비를 걸거나, 갑자기 연락을 끊거나, 상대의 호의를 무시합니다.
그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이 너무 소중해서, 잃을까 봐 무서워서, 먼저 벽을 쌓는 것입니다.
이 심리는 대상관계이론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뤄집니다.
어린 시절 주요 양육자와의 애착 관계가 불안정했다면, 우리는 친밀함을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내면화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손길보다, 그 손이 놓아질 때의 아픔이 더 선명하다면 우리는 사랑 앞에서도 ‘무의식의 회피’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4. 사랑받기 위한 나로부터, 진짜 나로 돌아가기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랑과 두려움의 모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정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진짜 나’를 천천히 회복하는 것, 그것이 시작입니다. 사랑받기 위한 ‘가짜 나’는 우리를 지켜주었지만, 동시에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진짜 나는 슬퍼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으며, 때때로 이기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생길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상대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경험은 깊은 치유를 불러옵니다. 이 과정에는 심리치료나 관계 내에서의 건강한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나의 감정을 존중하고, 떠나지 않고 머물러 줄 때, 그 반복된 안정감은 우리 안의 오래된 믿음을 서서히 바꿔줍니다.
“이제는 달라도 괜찮구나”
“이렇게 표현해도, 버려지지 않는구나”
사랑은 결국 있는 그대로의 나와 연결되는 과정입니다.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고 흔들리는 내 안을 나누고, 그럼에도 함께 머물러주는 사람을 만나는 여정,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연기하지 않아도 되고,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치며: 사랑 앞에서 진심을 품는 용기
사랑받기 위한 나, 사랑을 두려워하는 나...
이 둘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뿌리에서 피어난, 사랑을 갈망하는 두 개의 목소리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애쓴 시간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애씀 덕분에 우리는 상처 속에서도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고,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움 없이 사랑을 받는 연습을 해볼 때입니다. 사랑은 나를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품는 경험입니다.
누군가가 다가올 때, 너무 빨리 도망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이고, 있는 그대로의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