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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이야기들

by 목목헌 2025.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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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늘 아래 한 페이지, 여름은 그렇게 숨을 고른다.

 

여름은 그 자체로 감각의 계절입니다. 햇빛은 더욱 직설적이고, 공기는 무거워지며, 온몸이 열기에 휘감기는 듯한 느낌이 들지요. 하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잠시의 그늘을 찾습니다. 실제 나무 아래의 그늘이든, 혹은 마음속에 그리는 상상의 그늘이든 간에 말이지요. 그렇게 그늘 아래 앉아 책 한 페이지를 넘기면, 더위는 마치 물러나는 듯한 착각을 줍니다.

이럴 때 어울리는 글은 긴 이야기가 아닙니다. 짧고 간결하지만 마음속에 오래 남는 이야기, 그런 글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정호승 시인의 시구처럼 슬픔이 기쁨에게다가가는 부드러운 여운... 혹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처럼, ‘도시의 소음 속에서 건져낸 작은 침묵을 느낄 수 있는 구절들... 그늘에서 읽는 글은 어떤 특별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결말이 없어야 더욱 시원하지요. 마음이 자유롭게 상상할 여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늘 아래서 읽는 글은 마치 아이스티 한 잔 같습니다. 처음엔 차갑고 달콤하지만, 입안에 머무는 그 향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습니다. 더위가 아무리 심해도, 그런 글 한 편이면 우리 마음속 여름은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으면, 무더위는 잠시 잊혀집니다.

2. 바람을 닮은 이야기, 여행이 아니라도 떠날 수 있다면

 

무더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종종 여행을 꿈꿉니다. 어딘가 더 시원한 곳으로, 더 한적한 곳으로...

하지만 현실은 늘 그리 간단하지 않지요. 시간과 여건, 그리고 생활의 무게는 쉽게 우리를 움직이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글 속에서라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더울 때 읽기 좋은 글 중에는 여행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행은 반드시 낯선 풍경을 그려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머무는 골목, 오래된 우체국, 여름밤에 들리는 풀벌레 소리, 이런 것들이 더 강렬하게 '떠남'의 느낌을 전해주곤 합니다.

예컨대 윤후명 작가의 작품들은 짧지만 환상적인 여름밤을 떠오르게 합니다. "새의 말을 듣다"와 같은 단편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마치 바람이 귓가를 스치듯 가볍고 은근한 여행을 선사합니다.

또한, 김훈 작가의 글 속 묘사는 사물의 표면을 넘어서 그 너머의 시간까지 그려내지요.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한여름의 바닷가보다는 한겨울의 바람길을 떠오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계절을 거슬러 상상만으로 떠나는 여름의 피서, 진짜 여행보다 더 시원하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3.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이야기, 여름의 속도에 맞추다.

 

여름의 속도는 조금 다릅니다. 분명히 시계는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만, 더위 속에선 시간도 축 처진 듯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여름에는 조급하지 않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결말을 향해 급히 달려가는 이야기보다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일상과 감정 속을 천천히 거닐 수 있는 글이 어울립니다.

이런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어느새 시간의 감각을 놓아버립니다. 마치 시골 마을의 느린 오후처럼요. 주인공이 밥을 짓고, 마당에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다시 낮잠을 자는 동안 독자도 함께 그 시간을 체험하게 됩니다.

에세이 중에서는 김이나 작사가의 글들이 그런 여름의 속도와 잘 어울립니다. 그녀의 문장은 문득문득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복잡한 감정을 간결하게 풀어냅니다. "보통의 언어들" 같은 책은 무심히 읽기 시작했다가 어느새 마음 한 켠을 조용히 울리는 여운을 남깁니다.

또한 에쿠니 가오리의 글들도 여름에 자주 떠오릅니다. 그녀의 소설은 뜨겁고 서글프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 안에는 투명한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그 슬픔은 더위 속에서 오히려 시원함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감정이 식는 게 아니라, 감정이 투명해지는느낌이랄까요. 여름의 뜨거움 속에서 감정의 맑음을 마주하는 일, 그것이 바로 글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피서법입니다.

 

4. 차가운 감정, 그러나 따뜻한 여운

 

마지막으로, 더위 속에서 읽기 좋은 글은 아이러니하게도 차가운 감정을 다룬 글일 수 있습니다. 이별, 상실, 외로움 같은 감정들은 보통 쓸쓸함이나 아픔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더운 여름날에는 오히려 그런 감정들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역할을 합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가을 이야기지만, 여름에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는 계절을 초월한 감정의 고요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별의 이야기도 때로는 더운 마음을 식혀주는 얼음처럼 작용합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본래 뜨겁거나 차가운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나를 반영하는 온도이기 때문이죠.

김연수 작가의 단편들은 그런 감정의 온도를 잘 포착합니다. 그는 슬픔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으면서도, 글 속에서 은근하게 뿜어져 나오는 감정으로 독자의 가슴을 데웁니다. 하지만 그 열기는 여름의 더위처럼 피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 깊숙한 곳을 시원하게 씻겨주는 듯한 느낌이지요.

슬픔을 지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더위 속에서 위로가 됩니다. 그것은 더위도 슬픔도 결국 지나간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견디기 힘들어하던 계절도 언젠가는 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아주 소박하지만 강력한 믿음...

무더위는 여름의 가장 현실적인 얼굴이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작은 피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책 한 권, 글 한 편, 그리고 마음속의 그늘 하나면 충분합니다. 여름은 그렇게 지나갑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상, 그리고 조용히 흐르는 문장들 위로, 아주 천천히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