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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침묵의 병, 기분부전장애를 말하다. - 故 백세희 작가를 기억하며

by 목목헌 2025.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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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우울한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인 줄 알았어요.”

 

백세희 작가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우울한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인 줄 알았어요.”

 

조용히 그러나 오랫동안 마음이 말라가는 이 병의 정체를,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들여다보려 했고, 누구보다 용기 있게 고백했습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제목은 단숨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책의 제목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오늘도 겨우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심리적 진실을 담은 문장이었습니다.

고인은 생전에 기분부전장애, 즉 지속성 우울장애를 앓았다고 밝혔습니다. 겉으로는 일상을 유지하면서도 내면에선 무기력과 불안, 자책, 고독이 끊이지 않는 상태. 그것은 외부의 큰 사건이 없어도 사람을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잠식시키는 고요한 병이었습니다.

백세희 작가가 남긴 언어와 고백을 빌려, 우리가 쉽게 지나쳤던 기분부전장애라는 감정의 결을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고백이자,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마음의 풍경이기도 했으니까요.

기분부전장애는 결코 특별한 사람만 겪는 병이 아닙니다 .

2. 기분부전장애, 이름 없는 무기력의 얼굴

 

기분부전장애는 그 이름조차 생소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 속에 깊게 배어 있는 감정 상태입니다. DSM-5 진단 기준에서는 2년 이상 우울한 기분이 지속되며, 이로 인해 일상 기능에 영향을 받는 상태로 정의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병이 너무 일상처럼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백세희 작가 역시 처음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늘 무기력했고, 의욕이 없었으며, 사람들과 있을 때조차 외로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여겼고, 스스로를 탓하며 견디려 했습니다.

기분부전장애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무섭습니다. 급성 우울처럼 눈에 띄는 폭발도 없고, 자해나 자살 시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직장도 다니고, 친구와도 어울립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마치 감정이 바래진 것처럼, 기뻐할 일도, 슬퍼할 일도 무감각해지고, ‘그냥 살아지는하루하루가 이어집니다. 이는 삶의 생명력을 앗아가며,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마음을 지치게 만듭니다.

 

3. 고백,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언어

 

백세희 작가의 가장 큰 용기는 자신의 병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심리상태를 에세이로 남기며, 세상에 침묵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글을 읽으며 비로소 말했습니다.

 

",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도 이 기분을 느껴봤어"

"나도 괜찮지 않았는데 괜찮은 척했어"

 

그녀의 글이 특별했던 이유는 완성된 서사나 문학적 표현 때문이 아니라, 일상의 언어로 써 내려간 내면의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문장으로 만드는 일, 병을 이름 붙이는 일, 내 마음을 설명 가능한 감정으로 번역하는 일. 그것은 곧 살기 위한 언어였고, 생존을 위한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병을 감추고,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갑니다. 특히 기분부전장애처럼 오랜 기간 이어지는 만성적 감정 장애는 사회적 오해와 내면의 자책을 동시에 동반합니다. "왜 저 정도로 힘들어해?"라는 말은 때로 칼이 되어 돌아오고, "나만 나약한 걸까?"라는 질문은 자기를 갉아먹습니다.

그녀의 고백은 이 모든 질문에 아니, 그건 병이야라고 말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감정을 병으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병을 수치가 아닌 회복의 시작점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것이 그녀가 세상에 남긴 가장 큰 위로였을지도 모릅니다.

 

4. 우리가 남겨야 할 말들

 

2025, 백세희 작가의 부고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대신 써내려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글에서 위로받고, 자기 자신을 발견한 독자들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떠나보낸 듯한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부재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왜 아픈 마음에 이렇게 무심했을까?

왜 고통을 이야기하려면 이렇게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을까?”...

기분부전장애는 단지 진단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정서적 민감도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가, 일상 속에서 "요즘 어때?"라는 말이 진심일 수 있는가, 감정의 침묵을 읽어내는 감수성을 가졌는가...

우리는 이제 말해야 합니다. “늘 그런 기분이었어라고 말하는 이에게 그게 병일 수도 있어라고 알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고요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누군가의 일상에 조용히 다가가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며

 

백세희 작가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책으로 남기고, 그 책을 통해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부고는 여전히 우리가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상기시켜줍니다.

기분부전장애는 결코 특별한 사람만 겪는 병이 아닙니다.

그저 이름 붙여지지 않았을 뿐, 우리 모두가 그 고요한 무기력의 시간을 겪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너무 오래, 슬프지 않은데도 기쁘지 않았던 날들이 계속되었다면... 그건 잘못된 게 아니라, 그저 조금 더 아팠던 것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아픔을 말해도 되는 세상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